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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탐구 포럼의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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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작성일16-04-28 21:03 조회1,1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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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탐구 포럼>의 취지

한국 교회에 변화나 갱신, 개혁과 조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이제 이미 식상할 정도로 진부하게 느껴진다. 찬찬히 살펴 보면 주위에 그런 모임도 많고 여러 전문화된 기구나 그룹들이 생긴 것을 발견하게 되며, 또 이곳 저곳에서 연관된 행사를 갖기에 분주한 모습에도 접하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교회 탐구 포럼>과 연관하여, 왜 또 하나의 “이벤트”인가 하고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그런 이유일까? 세 가지 항목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충분히 한국 교회를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를 탐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둘째, 한국 교회를 이해하려는 두 가지 전통적 방도 모두가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탐구의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셋째, 한국 교회의 회복은 현 교회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없이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 탐구에의 시도가 급박히 요청되는 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 이유들을 하나씩 살펴 보자.


첫째 이유: 우리는 한국 교회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교회 탐구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마땅히 알아야 할 만큼 알지 못하는 데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요인이 존재한다. 우선, 그런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경험한 바가 없고 들어 본 적도 없으며, 비슷한 관념이나 메커니즘에 접근한 일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생 열대 지방을 벗어 나지 못한 미개인에게 눈이 내리는 풍경이나 “이글루”를 설명할 때, 혹은 신라 사람에게 컴퓨터의 역할을 묘사하고자 할 때 포착되는 반응이 바로 이런 몰이해의 좋은 예일 것이다. 이런 유형의 인식적 결여를 미(未)경험적 무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요인 또한 가능하고 비일비재하게 목도된다. 이것을 친(親)경험적 무지라고 해 보자. 이는 우리가 매일 매일 또 시시각각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노출되어 있고 심지어 그 경험하는 사물이나 현상의 일부를 구성할 정도로 친숙한데도 불구하고 (아니면 그렇게 친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인식과 경험의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언뜻 생각해 본다고 해도, 인간의 신분 상승 욕구, 십대 초반에 난무하는 학교 특유의 왕따 현상, 부동산 수급과 물가 변동 사이의 관계, 젊은 세대의 더치 페이(Dutch pay) 양상 등을 이런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국 교회에 속한 인물이요 구성원이기 때문에 아마도 한국 교회와 관련해 “미경험적 무지”를 겪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친경험적 무지”는 예상 이외로 깊숙이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침투해 들어와 있다. 우리는 한국 교회에 몸 담고 바로 그런 교회를 구성하는 실제 구성원이면서도, 한국 교회에 대해 너무도 많은 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혹시 어떤 이에게 이런 진단이 생경하고 생뚱같게 여겨진다면, 바로 그 자체가 우리의 무지 상태에 대한 반영일 수 있다.

 

우리에게 만연하고 있는 이러한 친경험적 무지의 증상을 자가(自家) 진단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안들을 생각해 보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한국 교회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일 다음의 질문들이 주어질 때 당신의 머리가 흐려지든지 어떤 내용의 답변을 제시해야 할지 당황한 느낌을 받는다면, 이는 틀림없이 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성령 사역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에 열광하는가?

**“중직자”(重職者)란 누구이고, 왜 또 어떻게 이런 용어가 생기고 퍼지게 되었는가?

**왜 기복 신앙이 한국 교회 내에서 계속 기승을 부리고 있는가?

**2000년도 이후 신학대학원 졸업자들(M. Div. 학위 수여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비율이 목회 사역에 투신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 무슨 활동을 하고 있는가?

**왜 교인들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훨씬 더 높은가?

**새내기 신입 사원이 겪는 신앙적․윤리적 갈등은 무엇이고, 교회는 이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국의 호칭 문화가 그리스도인끼리의 서열 의식에 미친 영향력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양적 성장에만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로 어떤 이들이 안티 크리스천(anti-Christians)을 구성하는가? (타종교인들?, 가나안 교인들[과거에 교회를 다니다가 이러저런 이유에 의해 교회 출석을 중단한 이들]?, 교회 내 비판적이고 개혁 성향의 그리스도인들?)

**왜 제자 훈련 프로그램은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 고백> 교육과 무관히 실시되고 있는가?

**목회자의 인격적 탄력성과 교회 운영 스타일 사이의 상관 관계는 무엇인가?

**왜 한국 교회는 사교육의 열풍에 대해 거의 입을 다물고 있는가?

**섬김의 리더십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목회자가 이런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기독교 세계관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들은 누구이고 왜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고, 만약 그렇게 되려면 교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는가?

**기독교 교리는 교인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데, 이런 경향이 낳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최근 20년 동안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의 성(性) 의식과 풍속도는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왔는가?

**무엇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가? (목회자들 편, 교회의 직분자들, 청년 그리스도인들 각각의 입장에서)

**전통적 설교 방식과 영상 시대의 멘털리티는 어떻게 조화되어야 하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경험을 주로 신앙 감정과만 연관시키는가?

 

그러므로 한국 교회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만성화되어 있는 친경험적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회 탐구가 거의 절대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둘째 이유: 한국 교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전통적 방도들이 그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교회 탐구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전통적 방도들”이라고 할 때, 본인은 두 가지 서로 다른 패턴을 염두에 둔 것이다. 첫째, 신학 교육에서 정규 과목의 수강을 통해 한국 교회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는 방도가 있다. 주로 목회학, 교회론, 교회 정치, 한국 교회사, 교회 성장학 등이 이런 과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들이 천편 일률적으로 인식하고 활용하는 바 한국 교회에 대한 이해 방식이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교회의 양적 성장이나 수적 부흥에 큰 관심을 쏟기 때문에 주로 이런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현황을 파악하고 대처 방안을 강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 방안 어느 것도 한국 교회의 진정한 이해에 의미 심장한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전자의 방도에서는 아무래도 교과서적이고 공식적인 교회 이해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특히 대부분의 신학 교재[한국 교회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가 외국 (많은 경우 미국) 저술의 번역이거나 한국인 저술이지만 주로 미국에서 훈련 받은 이들에 의해 쓰여진 내용이기 때문에, 이런 책자에 접하는 이들은 목회적 적실성의 각도에서 보든 마음으로부터의 공감이라는 면에서 보든 큰 도움을 얻지 못한다. 이렇듯 신학 교육을 통한 한국 교회 이해는 주제 제약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신학-목회 분열증을 역기능적으로 가속화하는 수가 많다.

 

그러면 후자의 방도는 좀 나은가? 그렇지도 않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경쟁적이고 비우호적인 목회 상황에 함몰된 채, 살아 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에 압도되어 그저 교회의 수적 증가에만 집착하기가 십상이다. 이런 환경과 정신 상태에서는 교회 이해가 매우 편중되고 단차원적이며 지나칠 정도로 단순화되곤 한다. 즉, 항시 교회를 수적으로 성장하느냐 아니냐의 각도에서 파악하고, 성장할 (혹은 성장하지 않을) 경우 무슨 요인 때문에 그렇게 되는가를 찾는 데만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끝이다. 그러니 이런 풍토에서 어떻게 한국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두 가지 전통적 교회 이해의 패턴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의 친경험적 무지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분단에서 예를 든 바이지만, 거기에 제시된 20 가지 질문들 -- 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데 -- 은 한국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그런 사안들이다. 그러나 신학교 강의실에서도 목회 현장에서도 이런 식의 질문들은 거의 제기되지 않는 수가 많고, 또 혹시 일부 내용이 거론된다 해도 그 누구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신학 교육이든 목회 사역이든 한국 교회의 진면목 파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동시에 그런 파악을 위해 의미 있는 자극이나 도전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바로 이런 무지와 미몽(迷夢)의 제자리 걸음을 한시 바삐 탈피하려면 상당한 정도의 자극과 각성이 요구되는데, 교회 탐구는 이것을 제공하는 중요한 방편과 계기가 될 수 있다.

 

셋째 이유: 한국 교회의 회복은 현 교회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포함하기 때문에 교회를 탐구하는 시도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회복이라는 것은 합당한 방안의 강구에서도 그렇지만 제대로 실현되는 사례가 적다는 점에서도 무척 힘든 일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회복도 그런 법이거늘 하물며 공동체적 회복의 경우에랴?!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난딱 드러누워 앓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비록 현실은 어둡고 힘겨워도 누군가는 한국 교회의 회복을 꿈꾸며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한다.

 

본인이 보기에 오늘날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부정적 시각으로서, 이 시각의 소유자들은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날카로이 파헤치고 약점을 지적하며 한국 교회의 전망이 흐리다는 식의 평가를 일삼는다. 이들은 주로 비판 일변도의 멘털리티를 벗삼아 질타․난도질․폄론(貶論)에 치중한다. 이와 반대되는 입장은 당연히 긍정적 시각이다. 긍정적 시각의 인물들은 대체로 한국 교회를 좋게 좋게 보아 주고 장점을 부각시키며 한국 교회와 관련해 상당한 정도의 자부심을 표출하곤 한다. 비록 현재 한국 교회의 처지가 힘들어도 머지 않아 하나님의 부흥 역사로 말미암아 또 한 번의 도약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 관측을 앞세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어느 한 시각만을 배타적으로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체적 추세를 이해한다는 면에서는 부정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으로 대별하는 것이 유익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본인은 상기한 두 가지 시각 모두가 결성적(缺性的)이라고 생각한다. 부정적 시각은 한국 교회의 궁극적 회복을 이루어 내기 힘들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고, 긍정적 시각은 한국 교회가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따라서 여기에 또 다른 시각, 제 3의 길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본인은 이 선택안을 회복적 시각이라 이름 붙이고자 한다. 회복적 시각을 내세우는 이들은 우리에게 “비판 의식”과 더불어 “회복에의 열망” 또한 보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복적 시각”이 언급되었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본인의 뒷이야기가 있다. 본인은 원래 철두철미할 정도로 부정적 시각의 보유자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부정적 시각은 두 가지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부정적 시각을 표출하고 주장하면 대부분 사람들 -- 그들이 본인의 비평 대상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본인과 의견을 같이 하는 이들의 경우에도 --의 마음이 닫혀 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비판도 어느 정도는 사람들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시행하는 법인데, 이런 부정적 시각의 발휘는 전략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헛다리를 짚는 결과로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본인의 이러한 시각과 태도가 선지자들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비판가(critic)와 선지자(prophet)를 비교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자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난 바리새인의 모습(눅 18:9-14)에서 찾았고, 후자는 통회와 간구를 통해 드러난 다니엘의 심정(단 9:3-19)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이 두 인물에 대한 대조 사항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인물/사항

비판가 (눅 18:9-14)

예언자 (단 9:3-19)

타인에 대한

자세

남의 약점을 지적함으로써 자기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부각시킴 (vv. 11-12); 남을 멸시함 (v. 9).

자기는 남보다 옳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vv. 11-12)하여 “우리”라고 하며 함께 죄인 됨을 고백함 (vv. 15-16).

활동의 초점

남의 잘못을 지적함 (v. 11).

상대방이 오류와 잘못에서 벗어나 변화되며 하나님께 회복되기를 바람 (vv. 17-19).

관심의 방향

자신의 번영에만 관심을 가짐 (vv. 9, 11).

공동체의 유익과 발전에 관심을 가짐 (vv.

16-19).

마음의 상태

자기 의(v. 9); 내심 흐뭇해 함 (v. 11).

슬픔, 안타까움 (v. 3).

 

결국 비판가는 상대방을 지적하는 비판 의식에 모든 것을 걸지만, 예언자는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보유하되 그것을 넘어서 사람들과 공동체의 회복에다 최종 목표를 두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본인은 부정의 시각에서 회복의 시각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이것만이 한국 교회의 회복을 열망하는 이들의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은 교회 탐구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함에 있어 본인은 먼저 하나의 도표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국 교회의 회복을 열망하는 데는 얼마 전에 설명했듯 비판 의식만으로는 부족하고 회복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상기 도표에서는 이 두 요소가 각각 “거룩한 의문”<교회 탐구>과 “거룩한 동일시”<선지자의 마음>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비판 의식 = 거룩한 의문” 없이는 “회복적 시각 = 거룩한 동일시”가 들어설 모판조차 형성되지 않는 셈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비판 의식 = 거룩한 의문”과 더불어 “회복적 시각 = 거룩한 동일시” 또한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 두 가지의 상관 관계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탐구 없이는 회복에의 방향 제시가 불가능하고

선지자의 마음 없이는 회복에의 동기 유발이 불가능하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 탐구의 필요성과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국 교회에 대한 올바른 탐구가 없이는 아예 한국 교회의 회복 과정이 출발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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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교회 탐구 포럼>이 필요한 이유를 세 가지 항목으로 살펴 보았다. 이것이 곧 <교회 탐구 포럼>의 취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회 탐구 포럼>에서는 첫 프로젝트로 “교회 직분자의 위상”에 대한 강좌를 열기로 가닥을 잡았다.

 

이런 취지를 들은 이들이나 첫 프로젝트에 대해 소식을 접한 이들은 대개 “그러면 앞으로도 이런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할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사실 이 질문은 본인 스스로 해 본 바이기도 하다.) 그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꼭집어 답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정도의 반응은 가능하리라고 본다.

 

본인은 이미 취지에서 밝힌 것처럼 한국 교회를 탐구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꼭 본인에 의해, 꼭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꼭 <교회 탐구 포럼>이라는 특정 명칭 하에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지만, 후자 곧 그것이 어떤 구체적 통로를 통해 실현되어야 할 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렇소” 라고 아직 그 누구도 확정적으로 공언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현재 계획하고 있는 첫 포럼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실험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강좌 프로젝트를 수행해 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를 알기 원한다. 만일 주관적 확신이나 여러 가지 환경적 증거와 부대적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해 나가기 원하신다는 확신이 들면,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당분간 계속 진행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확신이 들면, 극단적인 경우 <교회 탐구 포럼>은 1회에 그칠 수도 있다.

 

우리가 이토록 신중하게 접근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모든 것을 쳐 복종시키기 위함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일념 하에 모든 일을 수행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시금 천명한다 -- 한국 교회의 진면목을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교회 탐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단지 그 시행 방안, 시기, 인적 요인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더 알아 보고자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기쁘고 성실하고 겸손히 이 프로젝트에 임하게 하시기를!!

 

2010년 12월 4일 (토) 작성.

송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