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직분자, 2부: 한국 교회의 현장을 가다

만일 당신이 어느 한 교회[어한 교회: 교회명]의 생태와 성장 요인을 조사하도록 파송 받은 원리주의적 무신론 단체의 공작원이라고 해 보자. 당신은 신분을 숨긴 채 그 교회의 초신자로 잠입해 들어가서 2년 정도를 머물며 교회의 이모 저모를 면밀히 탐색한다. 궁극적 목표는 왜 어한 교회가 불과 십 수년 만에 현재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는지 내적 작동 원리를 파악하여 본부에 보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교회 활동의 진행 과정, 각종 모임에 있어서의 인원 동원 실적, 중심 인물들의 인간 관계 스타일, 재정의 염출과 사용처, 목회자의 리더십과 자질, 교회 구성원들의 종교적 의식(religious consciousness) 등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다각도에서의 심층 분석을 시도한 후 조심스럽게 가설-이론(hypothesis-theory)을 수립한다.

이렇기 때문에 어한 교회의 성장 혹은 발전 요인과 관련하여 당신의 과학적 조사 활동을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항목은 당신의 연구 결과에 고스라니 포함되어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필자는 당신의 연구 내용 가운데에서 분명코 “직분,” “직분자”라는 항목을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표현을 조금 달리하자면, 만일 당신의 연구 결과 속에 “직분”이나 “직분자”라는 항목이 빠져 있다면, 당신은 결코 주의 깊은 공작원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처럼 한 교회 -- 꼭 어한 교회뿐만이 아니고 모든 교회에 있어서 -- 의 존립과 직분자의 역할 사이에는 긴밀하고 또 의미 심장한 상관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직분자가 중요하다는 증거

사실 직분자가 한 교회의 유지와 발전에 있어 중요하다는 주장에 반기를 들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중요성을 속속들이 확인하기 위하여 필자는 “직분자 임명”이라는 행사를 분석하고자 한다. (혹은 앞에서 소개한 공작원의 비밀 기록서 가운데 “직분자 임명이 어한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세 가지 증거”라는 항목을 훔쳐 본다고 하자.) 이 분석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직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혀 줄 것이다.

첫째, 직분자 임명은 교회 전체의 축하 행사라는 점에서 공동체적으로 중요성을 갖는다. 직분자 임명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체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중요성이 크다. 우선, 직분자 임명이 이루어지는 “모임”의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이 임명의 공동체적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어떤 모임이 상대적으로 더 큰 중요성을 갖는가?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예배” 형식을 갖추는 모임은 그렇지 않은 모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 “예배”는 구역 모임이나 제자 훈련 세미나보다 더 중요하다. 또 비정기적이면서도 빈도가 뜸한 모임이 잦은 빈도의 정기 모임보다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된다. 부활절 예배를 평시의 새벽기도회보다, 대각성 전도 집회를 정기 당회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뿐만 아니라 특정 대상이 부각되는 모임은 모든 이의 평범한 참여로 이루어지는 모임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세례식 -- 특히 회심 간증이 따르는 경우에는 더욱 더 -- 이나 평신도 선교사 파송 예배는 단순한 수요 기도회나 각종 헌신 예배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런데 직분자 임명과 연관한 모임은 위에서 설명한 세 가지 기준 -- (i) “예배 모임” vs. 비(非)예배 모임, (ii) 빈도가 낮고 비정기적인 모임 vs. 잦은 빈도의 정기적 모임, (iii) 특정 대상 부각 모임 vs. 전 교인들의 평범한 참여 모임 -- 에 비추어 볼 때, 철두철미하게 전자에 속한다. 즉 직분자 임명 모임은 “임직 예배”의 형식으로, 매우 드물게 [교회에 따라 다르겠지만 10년에 한 번 정도?], 임직 대상을 강렬히 부각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직분자 임명 모임의 이런 특징적 양상은 이 일이 공동체 전체에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계속적으로 던져 준다.

직분자 임명이 교회 전체에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은 이 일을 교회의 공식적이고 공적인 행사로 자리 매김하려는 공동체적 방침이나 의지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주일 예배나 교회의 모든 행사가 공동체적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 행사를 다른 것과 차별화하여 기억하려는 노력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그러나 직분자 임명이 있는 임직 예배 같은 경우에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평소의 모임에 비해 교인들의 참석이 수적으로 급증할 뿐 아니라 모임의 분위기 또한 훨씬 더 들떠 있다. 모임 이후에도 축하의 소리들이 장내를 환하게 밝히고 기념 촬영의 명목 하에 사람들은 몇 번이고 새로이 포즈를 취해야 한다.

이 행사를 공동체적으로 의미 있게 만들려는 집합적 노력은 결국 그 교회의 역사에도 족적을 남기게 된다. 교회마다 자기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여 책 -- 바로 「△△교회 ○○년사」식의 책자 -- 을 내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그 교회의 중직자 -- 장로 교회의 경우 보통 “장로”와 “권사” -- 명단과 임직식 사진이 빠지지 않고 수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물론 가장 주목을 받는 대상은 담임 목사를 포함한 사역자들과 그들의 활동 내역이지만, 그 항목을 제외한다면 직분자들에 대한 소개에 가장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직분자 임명은 그 당시에나 후일의 역사적 기록에나 공동체적 축하 행사로서 그 중요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직분자 임명이 공동체적 중요성을 갖는 대사(大事)라는 것은 임직을 기념하여 직분자들이 수행하는 헌납 행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보통은 장로와 권사 취임 -- 침례 교회에서는 아마도 집사 임직과 연관이 되겠지만 -- 의 경우에 해당이 된다. 이것은 이미 한국 교회 내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런 전통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표이다. 하나님께서 직분을 맡겨 주셨다는 것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더 크다는 뜻이므로, 이에 대해 감사와 헌신의 반응을 보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자신의 목숨과 전체를 바쳐 섬기겠다는 결의의 가시적 표현으로 헌물을 바치는 것이다. 둘째, 공동체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통해 부르셨으므로 그 공동체와 구성원에게 자신을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헌물의 용도는 주로 공동체에서 꼭 필요한 기물이나 물건, 혹은 비용에 충당하게 된다. 이렇듯 임직을 통해 헌물을 바치는 것 또한 직분자 임명이 공동체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둘째, 직분자 임명은 목회자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 성장 단계의 의미 있는 분기점 노릇을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직분자 임명은 비단 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에만 중요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직분자 임명을 목회자만큼 의미 심장하게 받아들이는 이도 없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가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회 발전에 있어서 어떤 사항이 중요한 계기로 자리 잡는지를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행정 영역에 집중해 본다면, 그런 사항들 가운데에는 교회당의 건립이나 이전, 전임 부교역자의 기용, 특정 부서의 설립이나 확장, 구역이나 교구의 분리, 예산 규모의 증액, 교회 방문자와 등록 교인들의 지속적 보유 시스템 구축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빠질 수 없는 항목이 바로 직분자 임명이다.

하나의 교회가 직분자를 임명한다는 것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우선, 교회의 수적 증가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교단의 법 조항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직분자 -- 특히 장로 교회에서는 “장로”의 경우 -- 는 일정한 등록 교인 (혹은 세례 교인)의 수에 비례하여 임명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전제를 추론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또 교회 내에 일정 비율의 교인들이 일군으로 훈련 받았음을 보여 준다. 역시 교회마다 조금씩 틀리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직분자를 임명하기 전에 어느 정도의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장로직을 감당하는 경우와 서리 집사로 임명 받은 경우 사이에는 훈련의 과정․강도․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직분 임명의 준비 단계로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어디에나 해당이 된다.

뿐만 아니라, 직분자의 임명은 교회 조직이 강화되었다는 청신호이기도 하다. 교회가 외적으로 튼튼하려면 기본적으로 재정과 인원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 교우들의 경우일수록 헌금의 수준이나 교회 출석과 행사 참여가 저조하고, 또 그런 면에서 목회자를 안심시키기가 힘들다. 그러나 적어도 직분자 -- 집사와 장로, 권사 등 -- 로 임명 받은 이들은 교회 출석과 헌금의 납부에 있어서 어느 정도 신실성이 입증된 것 (왜냐하면 이러한 헌신의 약속을 묵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표명한 이들에게 직분의 기회가 부여되므로)이기 때문에, 이들의 임명은 분명히 교회의 기틀이 공고해졌다는 표시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교회가 직분자를 임명한다는 것은 그 사안/행사 이전에 전기한 바와 같이 적어도 세 가지 방면으로 튼실한 준비가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찌 목회자로서는 교회의 발전과 관련하여 직분자 임명을 중요시하지 않겠으며, 또 이런 일이 이루어짐에 따라 자신의 교회가 성장의 단계에 있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자평(自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대부분의 교역자실에 가 보면 설교 준비 자료들과 사진들이 눈에 띠는데, 그 사진들 가운데 꼭 들어가 있는 장면이 직분자 임직식에 관한 것이다. 목회자가 사진을 공적으로 전시하면서 자신이 보람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을 걸어 둘 리가 만무하다. 이렇게 겉으로 표명하고 싶을 정도로 직분자의 임명은 목회자에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셋째, 직분자 임명은 임명 받은 개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매우 의미 심장하다. 제일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직분자 임명이 그 당사자에게 신앙적 권위 부여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권위”(authority)란 방해 받지 않고 무언가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인데, 보통 실질적 권위(epistemic authority)와 직분적 권위(deontic authority)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실질적 권위는 당사자가 어떤 사안과 관련하여 지식․경험․기술을 갖추는 내적 구비와 연관이 되는데, 직분자는 대개 긴 시간의 훈련과 과제, 시험 등을 거치며 이런 권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반면 직분적 권위는 어떤 위치나 직위에 임명을 받으면 당연히 따라오는 특권으로서, 우리가 현재 묘사하는 공동체의 임직 행사와 더불어 향유가 시작된다. 이처럼 직분자는 자신의 직분 수행와 관련한 내적․외적 자격 조건을 갖춤으로써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고 다른 이들에 대해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직분자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직분자는 또 직분에의 임명을 통해 자신이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를 통한 개인적 의미도 무시 못할 정도로 다대하다. 우선,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들어왔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직분자가 되려면 [장로의 경우처럼] 교우들의 투표를 거쳐 일정 비율의 지지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혹시 교우들에 의한 선거가 아니고 목회자의 임명에 의해 직분자가 된다[권사나 집사의 경우처럼] 하더라도 교우들로부터의 평판이 매우 저조한 대상을 목회자가 임명할 리는 없다.) 또 직분자로 임명을 받는 것은 동시에 목회자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었다는 뜻이 된다. 이 역시 목회자가 직접 임명하는 직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교우들의 투표에 의거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추천 과정에서 목회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직분자로 임명 받는 일은 교인들로부터 또 목회자로부터 상당한 정도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그 당사자에게는 매우 의미 심장한 사건이 된다.

직분자가 자신의 임명 사실에서 상당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또 직분자 가족의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서도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즉 이 일은 직분자 개인에 의해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식구들에 의해서도 가족의 경사로 인식이 된다는 말이다. 특히 중직자 -- 장로나 권사 -- 로 임명을 받는 경우에는 그 날의 분위기가 자못 엄숙해지기까지 한다. 친척들의 축하 발언과 메시지는 임직식 당일의 흥분 상태를 더욱 고양해 준다. 이후로 이 가정은 “장로 집안” 혹은 “권사 집안”이라는 비공식적 라벨이 따라붙은 채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될 것이다. 만일 그 가족이 오랜 신앙 전통을 유지해 왔다면 그 라벨은 “몇 대째 장로 가정”이라는 좀 더 거창한 표현으로 바뀔 것이다. 임직자가 생긴다는 것이 이토록 가족 전체의 행사로 인식될 지경이니 당사자에게 주는 의미는 얼마나 더 크겠는가?!

이렇게 직분 임명은 교회 공동체적으로나 목회자의 입장에서나 임직 받는 당사자의 경우에나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직분자가 공동체 내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직분자의 세 가지 굴레

직분자는 지난 분단에서 밝힌 것처럼 공동체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들 특유의 제약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그러한 제약점일까? 필자는 이것을 세 가지 사항의 “굴레”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직분자는 자기 인식(self-knowledge)의 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일에 끊임 없이 심리적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아마 이것을 자아상(self-image)의 굴레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항시 자신이 어느 정도나 되는 존재인지 알고 싶어한다. 만일 자신이 이상(ideal)으로 상정하는 자아의 모습과 현재 자신이 지각하는 자아의 모습 -- 자신의 평가 및 주위 사람들의 평판을 종합함으로써 견지하게 되는데 -- 사이에 간격이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을 느낀다. 이것은 자아상의 문제가 극도로 선명히 부각되는 십대의 경우만이 아니고 인간이면 누구나 늙어 죽도록 경험하는 심리적 시소 게임이다.

그런데 이것이 직분자의 경우에는 심화된다. 원래 자기 인식의 구성 요소에는 자신이 누리는 여러 가지 조건들 -- 신체적․인격적․사회적․신앙적 -- 이 포함되는 법인데, 직분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한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아상 구성의 추가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일단 직분자가 되고 나서부터 이 요소는 쌍방으로 작용해서 자아 인식의 균형을 깨뜨린다. 한편으로 생기는 문제점은 직분과 관련한 교만/자부심/자랑의 태도이다. 본인이 다른 교우들과 차별화되고 남다른 위치와 역할을 점유한다는 사실이 정상적으로 말하자면 겸손․책임 의식으로 연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연약한지라 오히려 다른 이에 대해 거들먹거리거나 뻐기거나 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성숙한 이일수록 이런 시험에 쉽사리 굴복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렇게 굴복하지 않도록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잡는 내면의 훈련이 끊임 없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런 직분의 보유는 반대로도 작용한다. 언뜻 보기에 이 말은 모순처럼 여겨진다. 조금 전까지는 직분이 교만이나 자랑의 태도와 연관이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것이 실망, 열등 의식, 부족감 등을 산출한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도의 사례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K 장로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평소에 교회의 장로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는데, 이것은 특히 부친의 소원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장로직 임명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장로가 되면 아무래도 사람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관심을 끌며 특히 존경을 누릴 것 같아 부러워한 것이었다. 드디어 그는 장로로 임직을 받으면서 자신이 동경하던 위치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 K 장로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우연히 화장실을 지나가다가 교인들이 자신을 포함한 몇 명의 장로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말았는데, 그 내용으로 판단하건대 그들은 결코 장로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만날 때마다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장로님, 장로님”하며 불렀지만, 그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속으로는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로 인해 적잖이 실망에 사로잡혔고, 그 후 교우들이 조금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도 쉽게 주눅이 들곤 했다. 직분이라는 조건이 확보되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힘든 심리 상태에 봉착한 것이었다.

여기 또 Y 권사의 경우도 예로 들 수 있다. Y 권사는 자신의 교회 창립 20주년 때 동료 둘과 더불어 함께 권사에 취임했다. 확실히 권사로 불리고 활동을 하면서 교우들의 태도에 변화가 있는 것 같았고, 또 사실상 그랬다. 그러던 중 Y 권사는 권사 취임 5개월 만에 역시 심리적으로 힘든 상황에 접했다. 얼마 전 구역 모임에서 집안의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신혼의 자매를 도와 준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권사인 자신을 찾아가 의논해 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매의 문제를 세심히 들어 주고 대처 방안을 함께 강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었는데, 그 도움이 주효했던지 꽤 얼굴이 밝아지고 고마워했다. Y 권사는 보람을 느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특히 자신이 권사로서 그런 도움을 베풀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웬걸 … 얼마 후에 그 자매는 Y 권사의 조언과 달리 Y 권사가 보기에 실행 가능성이 낮은 방안을 좇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가! 더욱 놀란 것은 그 자매가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어떤 여자 집사 편에서 해 준 조언과 충고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Y 권사가 생각하기에 그 여집사가 그런 정도의 충고를 할 정도로 성숙해 있거나 긍휼의 성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쨌든 권사인 자기보다도 집사인 사람의 조언에 정신이 쏠렸다는 것이 당황스럽고 아쉬울 뿐 아니라 약간의 배신감까지 갖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례는 직분자들이 경험하는 그들 특유의 자아상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직분자들은 이렇듯 자기 인식에 있어 때로 교만/자부심의 올무에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실망과 열등 의식에 휩싸일 수도 있다. 만일 이들이 직분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식의 심리 상태에 몰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분자들을 옭아매는 자아상의 굴레이다.

둘째, 직분자는 호칭의 변화가 초래하는 상호 관계의 엇갈림, 소원, 단절 등을 융통성 있고 탄력 있게 재조정해야 한다. 이는 호칭 문화의 굴레로부터 연유한 어려움이다. 호칭 문화란 사람의 성(姓) 뒤에 어떤 직책, 직급, 역할, 신분에 관한 명칭을 붙여 그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상대를 그런 명칭으로 부르는 사회적 관습을 뜻한다. 우리 주위에는 고부장, 정판사, 박목사, 최사장, 이검사, 조원장, 민교수, 장대리, 방신부, 황소장, 김기사, 오선생, 설기자, 주감독, 마박사, 성총장, 전계장, 현총무, 송과장, 명대령, 강장관 … 등 수많은 호칭의 예가 존재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체로 대학문을 나서고부터는 호칭 문화의 현장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대학 동창 정도까지는 그저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그 이후에 만난 이들끼리는 결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한 사람이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대상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부모․배우자․형제․친척의 경우, 옛날 친구와 동료들, 학교의 스승이나 동창들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일부가 그 대상에 포함된다. 심지어는 이런 대상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의 이름 부르기를 꺼리는 실정이다.

그러면 어떤 이가 상대방에 대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최소 두 가지이다. 우선 그 대상을 어렸을 때부터 --적어도 그 사람이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 알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대상과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혹은 최소한 과거 어느 시기에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와 반대로 대부분의 사회 관계가 그렇듯이 상대방의 성에다 호칭을 붙여 부르는 것 역시 최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 대상을 나이가 들고 난 후에 만났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상대방과 어느 정도 예의상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면 사회에 진출하고 난 이후에는 우리가 어떤 대상과 더불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는 뜻인가? 그렇지는 않다. 분명 회사 내에서도 군대에 가서도 유학 중에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친밀하게 되어도 서로 이름을 부르는 식으로까지는 관계가 발전하지 않는다.

호칭 문화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세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첫째, 사람과 사람이 좀 더 인간답게 만나고 교류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박영효 사장과 김후락 사장이 만날 때 그들은 “사장”끼리 만나는 것이지, “박영효”와 “김후락” (혹은 “영효”와 “후락”이라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더욱이 박영효 사장과 조성해 사원이 만날 때에는 그 거리가 더욱 멀어진다. 같은 사장끼리 만나도 인간으로서 대하기가 힘든데, 하물며 직위가 다른 이들 사이겠는가?!

둘째, 사람들은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 좀 더 형식을 갖추고 격식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박영효 사장과 김후락 사장이 만날 때 그것은 박영효와 김후락이 만나는 것이기보다는 박영효 “사장”과 김후락 “사장”이 만나는 것 -- 바로 앞에서 설명했듯 -- 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시 자신과 연관된 어떤 직책․직급․역할․신분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고자 부심한다. 만일 이런 형식이 갖추어졌다 싶으면 만족해 하는 동시에 심리적 평정을 유지하지만, 그렇지 않은 때는 위신과 체면이 깎이는 것으로 여길 뿐 아니라 수치심까지 느끼곤 한다. 이처럼 호칭 문화 속에서 살아 가는 두 사람은 인간 그대로보다는 그 호칭에 상응하는 어떤 격식적 존재로서 서로를 대하는 것이다.

셋째, 호칭 문화에서는 사람의 가치와 중요성을 그 사람 자신보다도 그 사람의 직급/직책/역할/신분에 두기 때문에 가능하면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직급/직책/역할/신분을 꿈꾸게 된다. 다시 말해서, 김계장보다는 김과장으로, 김과장보다는 김부장으로, 김부장보다는 김이사로 불리기 원하고, 가능한 한 속히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을 때에 갖는 그 호칭으로 불리고 싶어 한다. 호칭 문화가 팽배한 곳에서는 호칭의 상승이 신분의 상승에 정비례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호칭에는 그에 상응하는 신분이 내장해 있다고 -- 어떤 식으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내에도 이 세상의 호칭 문화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대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교회야말로 호칭 문화의 전형적 훈련 장소가 되어 버렸다. 교회에서는 누구도 다른 이를 그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에서 듣는 호칭은 한결같이 성에다 직분명을 붙인 형태 -- 박목사, 김장로, 강전도사, 유권사, 이집사 등 -- 로 나타난다. 심지어 늦은 나이에 신앙을 가져서 현재 아무런 직분도 없는 경우에는 할 수 없이 “성도”라는 호칭을 부여한다. 이리하여 호칭 문화의 폐혜로부터 가장 멀어져야 할 교회가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호칭 문화의 대표적 발현 장소가 된 것이다.

호칭 문화의 교회 유입은 최소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 자매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같은 지체가 되었음을 축하하고 즐거워하기가 매우 힘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초신자에 이르기까지 일사불란한 상하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항시 그러한 직분적 위계 질서 하에서만 서로를 인식하고 대하지 않을 수 없도록 관계의 고착화 현상을 부추겼다. 둘째, 직분의 높고 낮음이 개인의 가치나 신앙 정도의 크고 적음을 나타내고 측정하는 척도로 둔갑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교회 직분을 흡사 승진과 같은 신분 상승의 일환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심지어 비신자 친구들의 경우에는 반(半) 농담 반 진담 가운데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나갔는데 아직도 장로가 못 되었느냐?”고 짓궂게 묻는 일까지도 있다는 것이다. 비신자들 사이에서도 직분의 임명은 승진의 일종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호칭 문화의 굴레는 최근 임직한 S 장로의 인간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S 장로는 장로 임직 후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모종의 변화가 찾아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어떨 때는 어색함, 또 어떨 때는 소외감이나 격리감으로 찾아 오기도 했고, 또 몇몇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당혹감을 동반하기도 했다.

S 장로가 어색함이나 소외감을 가지게 된 계기는 이런 것이었다. S 장로는 나이도 비슷하고 교회 출석의 경력도 비슷한 네 명의 집사 가운데 제일 먼저 장로로 피택을 받게 되었다. 장로 임직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임직 받은 직후부터 다른 집사들과의 인간 관계가 쉽지 않았다. 제일 먼저 걸리는 것은 역시 호칭 문제였다. 자신은 장로로 불리면서 다른 이들을 계속 집사라고 부르는 것이 왠지 건방지게 느껴졌다. 또 상대방 집사들도 자신을 부를 때 이제부터 갑자기 “S 장로님” --이 경우 “님”을 빼고 부르기는 힘들다 -- 하고 부른다는 것 역시 약간의 소외감이나 격리감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일단 신분이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 한국의 호칭 문화가 가르쳐 주는 바에 의하면 -- 거기에 걸맞은 호칭과 인간 관계로 조정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세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은 S 장로보다 연배가 2년 더 높은 고등학교 선배이었기 때문에, 더욱 처신이 용이하지 않았다.

한 번은 S 장로가 다른 집사 그룹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주일 학교 교사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S 집사님!” 하고 불렀다가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며 크게 미안하다는 제스추어를 해 보였다. 그러면서 “아, 이제 장로님이 되셨죠. 제가 S 장로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는 것을 깜빡 했네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S 장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가운데 머쓱하게 남아 있었다. 이것은 다른 세 집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일은 호칭 문화가 가져오는 묘한 변화들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S 장로가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동시에 기존의 장로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장로님”이라고 부르지만 나이와 관록이 많은 장로도 있었고 자신과 비슷하게 신참 장로에 속하는 이도 있었다. 당회에서 공식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일이 있을 때에도 나이 많은 장로들에 대해서는 태도․말투를 더욱 조심해야 했고, 더더구나 특정 장로의 의견에 반대하는 경우에는 훨씬 더 공손하고 겸허한 자세가 동반되어야 했다. 오히려 집사로 있을 때에는 장로들과의 관계에서 실수도 하고 치기 어린 투로 반박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는 앞으로 전처럼 과거의 집사 그룹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는 일조차 끊어지게 될 참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선배 장로가 찾아 와서 충고하기를, 앞으로 가급적이면 집사들과 동석하지 말고 식사도 장로들과 같이 함으로써 빨리 그들 사이의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S 장로에게는 보통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S 장로가 그토록 버거움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호칭 문화의 굴레가 주는 무거움 때문이었다.

이처럼 호칭 문화는 직분자들에게 있어 -- 특히 임직 전후의 전환적 시기에 --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인간 관계적․심리적 상황을 초래한다. 이런 어려움, 불편함, 소외감은 호칭 문화가 얼마나 깊이 한국 교회에 침투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직분자들은 한국 교회의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 바로 이러한 호칭 문화의 굴레를 떠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셋째, 직분자는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전보다 훨씬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세 번째 사항을 필자는 목회자 관계의 굴레라 칭하고자 한다. 직분자 편에서 목회자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세 가지만 거론하고자 한다.

(i) 첫째, 교회를 다니게 되면 자연히 목회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인의 관례나 인습에 의거하자면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두 가지 서로 맞물린 사실을 의미한다. 우선, 어떤 조직체에 가입해서 그곳의 일원이 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행습(行習)은 서양인들이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 어떤 조직이나 협회 -- 신앙인의 경우 교회 공동체 -- 에 가입하는 개인주의적 멘탈리티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인의 경우 이것은 주로 공동주의적 성향의 발로이다. 그러나 이 공동주의는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 정신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해 온 집단주의적 공동주의(collectivistic communitarianism) -- 흔히 가문․종친회․동창회 등과 같이 먼저 어떤 집단과 연관을 맺음으로써 거기에서 개인의 정체와 의의를 찾는 식의 공동주의 -- 이다. 일단은 집단/조직체에의 가입을 통해 소속원이 되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그 조직체 지도자의 수하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집단주의적 공동주의에서는 그 조직의 지도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된다. 조직에 속한 개개인은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반응한다. 이렇듯 지도자와 형성하는 수직적 관계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에 조직 구성원 상호 간의 수평적 관계는 별로 큰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사실은 그것조차 얼마든지 지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하시라도 재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지도자와 어떤 식으로 엮이는가, 어떻게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가, 어떻게 다른 이보다 더 지도자의 눈길과 주목을 끌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초미의 관심을 나타낸다.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몸담아 온 이러한 집단주의적 공동주의는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한국이 과거 30-40년 동안에 상당히 서구적 개인주의에 영향을 받아 왔지만, 이것은 주로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고 일단 사회적 관계나 작동 방식으로 가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공동주의적 멘탈리티 -- (i) 일단 어떤 조직체에 가입하여 소속 의식을 가짐으로써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고 생각함; (ii) 조직체의 지도자와 모종의 연줄을 형성함으로써 조직 활동의 의의를 찾음 -- 가 교회 참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명한 목회자를 선호하고 그런 이들이 사역하고 이끄는 교회에 출석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곤 한다. 특정 교회를 나간다는 것은 그 목회자가 대표하고 운영하는 교회 조직체에 가입하여 그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한국 사회에 살아 가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진 삶의 방식이다. 이 점이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실이지만, 직분자가 되든지 앞으로 될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하여 직분자는 직분에 임명 받기 훨씬 전부터 이미 하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목회자와 연관하여 수립하게끔 되어 있다. 물론 그가 앞으로는 목회자라는 존재를 훨씬 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ii) 둘째, 목회자가 어떤 이를 직분자로 임명하거나 후보로 천거할 때에는 그 대상에 대해 모종의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므로 직분자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눈치 빠른 직분자 (혹은 후보자)는 목회자가 자신을 임명하거나 천거할 때 그로 인해 산출될 수 있는 유익을 어느 정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챈다. 고려하는 바 유익은 대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다.

첫 번째 중요한 사항은 목회자가 얼마나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신임을 촉발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이다. 성경에서 명시하고 있는 자격 조건(딤전 3:1-13; 딛 1:5-9)의 보유일 수도 있고 다른 교우들의 평판일 수도 있다. 혹은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이 맘에 든다든지, 고향이 같아서 마음이 잘 통한다든지, 다양한 사회 경력과 폭넓은 인간 관계를 장점으로 가지고 있다든지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목회자는 자신의 믿음이 가지 않는 인물을 직분자로 임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사항은 자신의 목회 철학을 실현하는 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어차피 직분자들의 수고와 협조가 없이는 어떤 목회 방침과 목표 -- 교회 성장이든 질적 성숙이든 특수 목회의 비전이든 -- 도 그 결실을 보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목회자로서는 그러한 목표 달성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여겨지는 인물을 직분자로 삼고 싶어한다.

세 번째 중요한 사항은 직분자가 얼마나 목회자에 대해 정신적 지지자(moral supporter) 노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늘 복잡한 인간 관계를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취약하고 상처 받기가 쉽다. 그래서 표면상으로는 항시 의연해 보이고 용감하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우들의 비판이나 비난을 견디기 힘들어 하고 심지어 두려움에조차 휩싸이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입지를 세워 주고 격려를 실어 줄 인물이 긴박히 요구된다. 직분자로부터 기대하는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이러한 내면의 사정을 직분자가 될 이에게 전달한다. 물론 목회자의 스타일과 기질에 따라 이런 것들을 단도 직입적으로 분명히 말하는 수도 있고, 아니면 에둘러서 완곡히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어떤 식으로든 직분자가 될 이에게 자신의 내면을 열어 보이고 이런 점들을 어느 정도 소상히 밝힐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직분 임명을 앞에 둔 이는 엄청나게 큰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목회자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았기 때문에 친근감을 가지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이런 사정을 안 이로서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직분자로서는 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이겠는가?!

(iii) 셋째, 직분자가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것은 정작 임명을 받고 나서부터이다. 이제 직분자는 목회자의 말․설명․활동․관심사 등을 통하여 그가 무엇을 원하고 지금 그 무엇에 마음이 쏠려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목회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목회자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뜻이 된다. 소위 정치권에서 대통령의 마음을 파악해야 한다면서 “김심(金心) 읽기” 혹은 “이심(李心) 읽기” 등을 운운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대개 이런 일에 있어서는 명시적인 의사 소통보다는 은연 중의 언급, 무심코 던진 한 마디, 예측 불허의 돌발 행동, 표정과 인상 등이 중요한 단서로 작용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게 되기가 쉽다.

목회자에게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목회자의 마음을 파악했다고 해도, 직분자가 그 어떤 사안에 대해 중심으로부터 목회자의 제안에 동의하지 못할 때 갈등과 부담은 크게 증폭된다. 과연 이 시점에서 그냥 자신의 뜻을 굽히고 무조건 목회자를 좇을 것인가? 아니면 목회자를 찾아가 과거 충신이 임금에게 했듯 소신을 다해 자신의 입장을 밝힐 것인가? 또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저 중립적 위치에 서서 관망하는 자세로만 일관할 것인가? 이런 여러 가지 고민은 모두가 목회자와의 관계에 별 이상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더욱 어려운 경우는 직분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겨 긴장감과 적대적 감정이 고조될 때이다. 그 의견 충돌의 중심에 목회자의 어떤 목회 방침이나 사역 계획, 건축 프로젝트 등이 걸려 있을 때 -- 그리고 목회자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 있을 때 --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만일 목회자가 자신을 따로 불러 협조를 요청할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인가? 목회자의 기대에 부응해 전적으로 목회자를 싸고 도는 입장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경우에는 목회자의 협조 제안에 등을 돌리고 반대편에 합세할 것인가? 목회자를 보필하는 것이 직분자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상황과 처지에 따라서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직분자로서는 이 모든 일에 극도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이런 모든 딜레마의 상황은 직분자가 목회자를 도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발생한다. 만일 그가 직분자 가운데 하나로 임명을 받지 않았다면, 목회자의 관계를 그렇게까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따라서 직분자는 목회자 관계의 굴레를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직분자가 갖는 마지막 굴레 -- 목회자 관계의 굴레 -- 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로써 직분자에게 압박을 가하는 세 가지 굴레 -- 자기 인식의 굴레, 호칭 문화의 굴레, 목회자 관계의 굴레 --를 전부 소개한 셈이다. 이제부터는 직분자의 영향력에 대해 논할 것이다.

직분자의 영향력

직분자가 비직분자에 비해 남다른 제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난 분단에서 자세히 살펴 본 바와 같다. 그러면 이것이 전부인가? 직분자는 이토록 제약점에 갇혀만 있고 그 굴레에 얽매여만 하는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직분자에게 이러한 제약점과 굴레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들을 박차고 나와 웅비(雄飛)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제 필자는 직분자들만이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이 존재함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직분자의 이러한 영향력은 크게 두 가지 방면으로 현시될 수 있다.

첫째, 직분자는 교우들에 대한 모범이 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한다. 성경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지만 (롬 15:5; 갈 4:19; 벧전 2:21), 이것은 많은 경우 인간 지도자의 모범을 매개로 한다고 가르친다 (고전 11:1). 따라서 지도자들에게는 “모범을 보이라” (혹은 “본이 되라”)고 말하고 (딤전 4:12; 딛 2:7; 벧전 5:3), 다른 이들에게는 “모범을 좇으라” (혹은 “본을 받으라”)고 말한다 (고전 4:16; 11:1; 빌 3:17; 살후 3:7, 9; 히 6:12; 13:7; 약 5:10).

그러면 직분자는 어떤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세 가지 사항을 부각하고자 한다. (i) 먼저 직분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라는 면에서 교우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뭐니 뭐니 해도 신앙인의 공동체인데 거기서 신앙적 특징이나 경건의 훈련 모습이 모범의 항목으로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으며 어떻게 경건의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 것인지에 대해, QT의 중요성, 말씀 묵상과 기도, 공예배 때의 자세,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길, 죄의 자백과 성화의 훈련 등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전제하는 것이다. 단지 새벽 기도회나 주일 예배 참석에 대한 강조만으로 신앙적 모범을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교우들에게 모범으로 부각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현시 방식이 있다. 우선 공식적이고 직접적인 형태를 취함으로써 신앙적 모범을 보일 수 있다. 이것은 혹시 기회가 되어 상기 주제들에 대해 발표를 하거나 교우들이 질문을 할 때 하는 답변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앙적 모범이 실효성을 발휘하는 더 많은 경우는 아마도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형식을 통해서일 것이다. 이것은 직분자와의 대화 시에, 교우들을 위한 기도 내용 가운데, 삶 속에서 겪는 고난과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희끗 희끗 드러난다. 그 때 교우들은 직분자에게서 구원의 즐거움과 감격이 어떻게 녹아 나고 있는지,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어떤 식으로 예배․찬양․기도로 표현되는지, 얼마 전에 겪은 경제적 위기 속에도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알았는지 생생히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두 가지 현시 방식은 사실 하나로 융해되어 작용한다. 그러나 어쨌든 직분자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라는 면에서 교우들의 모범이 되고, 교우들이 그 본을 받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

(ii) 직분자가 모범이 되어야 하는 또 다른 사항으로서 사역에 대한 책임 의식과 성실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마 4:23; 9:35)을 계속해 나가는(요 14:12) 사역 공동체이다. 이런 다양한 일(고전 12:8)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께서는 영적 은사를 분여하시고(고전 12:4, 11), 직임을 맡기신다 (롬 12:4; 고전 12:5; 엡 4:11). 또 이렇게 일/은사/직임이 맡겨진 이들을 총칭하여 일군(마 9:37; 고후 11:23; 골 1:7, 23, 25; 딤전 5:18; 딤후 2:15)이라고 부른다. 사실 직분자는 이 “일군”의 다른 명칭이다.

일군 -- 또 직분자 -- 은 일/사역을 하는 사람이다. 일을 제대로 해내지 않으면 일군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일군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자격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일군으로서의 강한 책임 의식이 요구된다. 바울은 이 책임 의식에 대해 “빚진 자”(롬 1:14)라는 표현을 빌어 설명했고, 심지어는 이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고전 9:16)이라는 “거룩한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직분자가 이처럼 강한 책임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 모든 일/사역의 책임이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기 때문이다. 비록 직분의 임명이 목회자의 추천과 교우들이 인정[투표]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직분자를 부르시고 직분을 맡기신 것이다. 공동체에서 일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도 봉착하게 되고 남들이 알아 주지 않는 가운데 희생을 해야 하는 때도 있다. 이 때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 의식이 강한 직분자와 그렇지 않은 이 사이에 차이가 생긴다. 책임 의식이 강하지 않은 이들은 핑계를 잘 내고 수시로 다른 이와 환경을 탓한다. 그러나 책임 의식이 강한 직분자들은 상황과 처지가 우호적이 아닐 때에도 여전히 의연한 모습을 한 채 불굴의 의지로써 일을 처리해 나간다.

둘째, 일군/직분자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면 성실해야 (충성스러워야) 한다. 성실성(충성스러움)이란 어떤 대상이나 사안에 대해 꾸준하고 믿음직스러우며 초지 일관의 자세를 나타내는 성품적 특질이다. 그래서 디모데(고전 4:17), 에바브라(골 1:7), 두기고(골 4:7), 실루아노(벧전 5:12) 등 훌륭한 일군을 묘사하는 데 “성실하다/신실하다”는 말이 사용되었다. 바울 역시 일군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특질로서 충성(성실성)을 언급한다 (고전 4:2). 또 직분이나(딤전 1:12) 은사의 활용과 관련해서도(롬 12:8) 충성(성실성)을 거론한다. 신실한 직분자는 기분이나 감정 상태에 따라 심한 기복을 나타낸다든지 예측 불허일 정도로 변덕스럽게 반응한다든지 하지 않는다. 또 인간 관계가 꼬이고 여건에 변화가 생겨도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함부로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직분자는 일의 추진 과정 내내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공동체의 안정성 유지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면에서 직분자는 일반 교우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한 번 생각해 보라 -- 만일 여기 어떤 직분자가 있는데 그에게서 책임 의식도 성실함도 발견할 수 없는 경우를! 차마 겉으로는 뭐라고 하지 못하지만 교우들끼리 모이면 모두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겠는가? 반면에 책임 의식이 강하고 성실하기 그지없는 직분자를 대동하고 있다면, 교우들은 얼마나 흔쾌해 하고 또 그 직분자를 열렬히 본받고자 할 것인가?!

(iii) 직분자가 보여야 할 모범의 필수적 항목 가운데 마지막은 겸손과 섬김의 마음 자세이다. 겸손은 결코 연약함이나 열등한 상태를 신앙적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겸손은 상당한 장점(merit)과 관록과 성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격 없음(unworthiness)을 덤덤히 인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인정은 억지로거나 꾸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상기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 것을 확언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궁극적 원인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찾는다 (고전 15:10).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바울은 절대로 이방인 사도로서의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역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셈이다 (고전 3:7).

직분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감격이 있으면 결코 교만하거나 뻐기거나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지 않는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 그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다 -- 경건의 능력이나 하나님과의 친밀성이 뛰어나고, 일을 하나 맡으면 똑부러지게 완결하는 능력을 갖추었으며, 자신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공동체 내에 열매가 나타났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그런 사실과 증거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철두철미하게 인식하고 간증한다.

직분자에게서 섬김의 정신이 발견되어야 하는 것도 결국 그가 얼마나 주님의 모습을 닮았는가 하는 것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늘 종의 모습과 자세를 견지하는 것,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셨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5)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남과 달리 신분․재능․은사가 부여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빌미로 사람들을 좌지우지하거나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의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그런 것들을 활용하여 더 못 누리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직분자가 다른 교우들에 대해 취해야 할 기본 자세이다. 또 이것이 이 세상의 권세 높은 자와 교회 직분자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자신에게 있는 특권과 강점을 과시하여 사람들을 부리고 압제하고 예속시키려 한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자는 반대로 자신에게 부여된 신분, 은사, 장점들을 도구로 하여 다른 사람들을 부지런히 섬기고자 한다.

물론 겸손과 섬김의 정신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일수록 섬김의 정신이 투철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섬김의 자세가 내면화되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직분자에게서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함께 통합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진실로 이런 면에서 다른 이들과 뚜렷이 차별화되어야 하고 그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직분자가 교우들에 대해 모범이 되어야 할 사항을 세 가지 -- (i)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ii) 사역에 있어서의 책임 의식과 성실성, (iii) 겸손과 섬김의 마음 자세 -- 로 소개했다. 직분자는 이렇게 모범이 됨으로써 교우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제 다음에는 직분자가 어떻게 하여 동료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살펴 볼 예정이다.

둘째, 직분자는 동료들 사이에 화합을 이끌어 냄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관계를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것은 직분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다르게 이야기한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간에 사랑해야 한다 (요 13:34-35). 형제 사랑은 함께 형제(및 자매)된 이들 사이에 나타나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롬 12:10; 살전 4:9; 히 13:1; 벧전 1:22; 벧후 1:7).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간 추구해야 할 것은 화평이다 (롬 12:18; 히 12:14; 약 3:18; 벧전 3:11). 사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화평이신 고로 사람들 사이에 장벽을 허물고(엡 2:14), 또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복된 역할을 하기 기대하신다 (마 5:9).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형제 사랑과 화평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실현하고자 애쓸 때 자연히 그런 이들 사이에 공동체적 화합이 도출될 것이다.

만일 교회의 직분자들 사이에 이러한 화합이 가시화되고 상호 관계의 특징으로 체현된다면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이런 일은 다른 외부인이 아니라 바로 그 직분자 그룹에 속한 사람에 의해 시작(및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을 실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직분자가 공동체적 화합을 실현하기 원할 경우 그는 세 가지 항목 -- 갈등 관리, 경쟁심 해소, 신뢰 형성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일 먼저는 구성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드는 “갈등의 현상”에 잘 대처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파괴적 요소, 곧 “경쟁심을 해소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을 없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상호 간의 신뢰”이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어떤 그룹이든지 화합을 경험할 수 있을 터인데, 이것은 직분자 그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필자는 직분자 개인이 이 세 가지 항목과 관련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하나씩 살펴 보고자 한다.

(i) 우선 직분자는 그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제대로 관리함으로써 화합에의 첫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갈등은 개인끼리나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서로 간의 이해나 목표가 달라 상호 대립의 위치에 처하게 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은 어떤 경우 자원의 부족으로 인한 욕구 및 의지의 마찰 현상[결여(缺如) 갈등] 때문에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결정 사항이나 취해야 할 행동 방침을 놓고 서로 간에 의견이나 견해가 엇갈림으로써 [시차(視差) 갈등] 발생할 수도 있다. 직분자 사이에서 많이 발견되는 갈등은 주로 -- 물론 첫 번째 타입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 두 번째 타입이다.

갈등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항은, 갈등은 그 자체로서 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갈등이 죄로 발전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죄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갈등은 하나의 시험(temptation)인데, 특히 인간 관계에서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갈등이 죄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갈등은 인간 관계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폭넓게 발생하는가 하면, 방심할 경우 그 폐해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직분자들 사이에 갈등이 배태되고 나타나는 요인으로서 네 가지 서로 맞물린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인간 내적이거나 인간 관계적인 문제가 갈등의 요인이 된다. 열등 의식이나 우월감 등 건강하지 않은 자아상이 그럴 수 있고, 시기․상처․집착 등 정서적 요동 상태 역시 한 몫을 한다. 또 편견․오해․선입견 등의 옳지 않은 전망도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둘째, 기질과 성격의 차이가 갈등 요인으로 작용한다. 첫인상의 작용, 선호의 문제, 사고 방식의 차이, 가정 교육이나 문화적․사회적 배경의 차이 등이 그런 예이다. 셋째, 공동체적 의사 결정과 연관된 사안들이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제직회 및 당회의 논의 진행이나 안건 처리에 있어 결정하는 방식의 차이, 교회 행정이나 사역의 기획에 있어서 접근 방식의 상이함, 리더십의 특징적 양상과 스타일에 있어서의 다양성 등을 의미한다. 넷째, 신앙상 불일치 또한 갈등의 소지가 된다. 여기에는 신앙의 표현 양태가 다른 것도 이유가 되지만, 때로 더욱 근본적으로는 믿는 내용이 현격히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필자는 전기한 바와 같이 갈등이 그 자체로서 죄는 아니지만 얼마든지 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갈등은 연관된 이들의 반응에 따라 상반된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 된다. 만일 갈등을 지속적으로 은폐하든지 방치하면 파괴적 사태로 발전하고 결국 “관계의 죽음”이 찾아온다. 그러나 갈등을 솔직히 인정하고 문제 해결에 합리적으로 임하면, 오히려 유익을 맛볼 수도 있다. 따라서 갈등에 대한 대처 방식이 갈등 관리에 있어서 핵심적 사항이 된다.

자, 그렇다면 갈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직분자들에게 필요한 사항을 다섯 가지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직분자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은혜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이 표현한 것처럼 우리는 은사에 있어서만 다양한 것(롬 12:4; 고전 12:14-21)이 아니고 기질과 스타일, 사고 방식과 인식의 습관에 있어서도 다양하다. 이런 현상은 우열이나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서로 다를 뿐인 것이다. 오히려 이런 차이와 다양성이 직분자 개인과 공동체를 더 풍요롭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차이가 우리를 조금씩 불편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을 꼭 위협적 요소로 간주하지 말고 오히려 참고 견디고 받아 주는 사랑의 훈련 기회로 삼아야 한다.

둘째, 직분자들은 갈등의 상황을 오히려 유익한 계기로 포착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갈등을 억지로 유발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갈등이 생긴 이상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라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적극적인 자세의 함양이다. 갈등 자체와 그에 따른 부속적 사태는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잘 다룸으로써 성숙의 열매를 맺도록 힘쓰겠다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런 태도가 지속적으로만 견지된다면, 갈등이 없었더라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그런 유익한 결과가 창출될 것이다.

셋째, 직분자들은 갈등에의 대처 과정에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대화와 만남의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해야 한다. 갈등의 문제에 직면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갈등의 촉발자와 더불어 만나게 되고 또 대화를 시도하게 된다. 이 때 직분자는 만나서 대화하는 내내 계속 하나님을 올려다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상대방의 마음 문을 활짝 여셔서 불필요한 장벽이나 더 이상의 장애물이 가로막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 대화를 하는 동안 부정적 언급을 해야 할 경우 합당한 태도와 적실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상처나 아픔이 가중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 때 그의 장점, 그가 공동체에 기여한 바, 그로 인해 고맙게 느끼는 점 등을 덤덤히 나누는 것도 사랑의 관점에서 보든 전략의 관점에서 보든 지혜로운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자존심과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갈등과 관련하여 마땅히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직분자끼리 함께 참여하는 공적 회의에서 갈등이 불필요하게 증폭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회의 석상에서 갈등이 유발되는 가장 흔한 이유는 불확실한 의사 소통, 의견 충돌로 인한 자존심의 손상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는데, 특히 후자가 더 큰 문제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직분자들이 회의 석상에 임할 때 다음과 같은 점들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발언 내용의 합리성․타당성․효과성에만 집중하고 누가 발언했는지에 대해 너무 신경을 많이 쓰지 않도록 한다. 또 많은 경우 회의의 결정 내용보다 회의의 내용을 어떻게 결정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대부분의 행정적 사항은 최선의 방안이 어느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결정이 되든 공동체적 의사 결정에 함께 참여하여 함께 상호 유익을 꾀했다는 정신의 공유가 중요하다. 이외에도, 남의 의견을 경청하기,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자신의 실수와 헛말을 인정하기, 신앙 사활(死活)의 문제가 아닌 이상 대다수의 의견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기 등이 갈등의 완화에 상당히 큰 도움을 준다.

다섯째, 직분자들은 “신앙의 불일치”가 실제로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해 적실히 대처해야 한다. 만일 갈등의 초점이 신앙의 표현 방식이나 강조점의 차이에 있는 것이라면 대화와 설명을 통한 조정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주일의 시간 사용 문제라든가 성령의 충만을 인식하는 방식이라든가 하는 것 등이다. 이에 반해, 신앙 내용에서의 차이가 문제일 경우에는 일단 본질적 내용과 비(非)본질적 내용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신앙의 본질적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절대화하여 말하기가 힘들지만, 일반 복음주의 교회의 경우 <사도 신경>의 조항들을 거론할 수 있겠고, 개혁파(및 장로교)의 경우 TULIP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본질적 내용에 해당하지 않는 사항은 모두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직분자들 가운데 생기는 갈등은 아마도 대부분 비본질적인 내용과 연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본질적인 사안에 있어서는 직분자들 사이에도 개인의 확신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음 -- “우리는 동의하지 않기로 동의한다” (We agree to disagree) --을 인정하는 것이 성경의 길이다 (롬 14:5). 따라서 이런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시간과 정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직분자들은 갈등의 악화를 미연에 방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혹시 갈등의 사태가 발생한 경우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함으로써 갈등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직분자들은 공동체의 화합 실현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셈이 될 것이다.

(ii) 그 다음으로 직분자는 자기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쟁심을 해소함으로써 화합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면 그들 사이에는 묘한 경쟁심이 배태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불과 열 두 명밖에 되지 않는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수시로 “서로 누가 크냐?”라고 하면서 서열을 따진 것(막 9:34; 10:37 및 41; 눅 22:24)도, 실은 경쟁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경쟁심/경쟁 의식은 이처럼 파괴적인 비교 의식, 질투, 자만이나 우월감 등과 연관된 심리 상태로서, 죄악된 것으로 판정해 마땅하다. 물론 “경쟁” 자체는 사회가 유지되는 객관적 작동 방식으로서 반드시 죄된 것이라 할 수 없고 (신학교 입학도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 “경쟁력이 높다”는 용례에서와 같이 경쟁의 활동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음을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경쟁심/경쟁 의식은 구성원 개개인 사이에 균열과 이간을 초래하고, 공동체 전체의 발전과 성장에 대해 저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직분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들 사이에 경쟁심/경쟁 심리가 유발되는가? 그것은 자신에게는 결여되어 있으나 다른 이에게는 갖추어져 있는 그런 부러운 조건들로 말미암는다. 예를 들어, 어떤 직분자가 교육관 건축 프로젝트의 위원장으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든지, 대표 기도로 인해 교우들에게 감명을 끼치곤 한다든지, 목회자와 동창 관계로 둘 사이의 관계가 아주 각별하다든지, 맡은 구역의 수적 성장이 괄목할 정도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또 그 이외에 어떤 이가 외교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로 근무하고 있다든지, 재정적으로 넉넉해서 늘 교역자 대접을 잘 하고 있다든지, 자녀들이 총명할 뿐 아니라 신앙의 열정 또한 대단하다든지, 모슬렘 지역 선교 단체의 이사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들도 예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다른 직분자가 가지고 있는 조건들 때문에 경쟁심/경쟁 심리가 촉발되곤 한다.

경쟁심/경쟁 의식이 직분자들 사이에서 초래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가장 흔한 문제점은 직분자 개개인이 쓸데 없는 일에 마음을 쓰고 그로 인해 정신적 에너지가 낭비된다는 것이다. 일단 경쟁심이 부추겨지면 연관된 당사자들 사이에는 근거 없는 피해 의식이나 파괴적 망상이 난무하기 마련이고, 심지어 다른 직분자가 나타내는 선의의 행동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로 반응하기 쉽다. 그리하여 만일 경쟁심이 개재되어 있지 않다면 훨씬 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었을 정신적 자원들이 안타깝게도 다른 쪽으로 빠져 나간다. 뿐만 아니라 평소 같으면 넉넉히 덮어 주고 감싸 줄 수 있는 사안들조차 침소봉대되어 위협 요인으로 돌변하게 된다. 일단 문제가 불거지고 나면 직분자들 사이에 마음이 나누어지고 걸핏하면 의견 충돌로 비화한다. 만일 직분자의 수효가 꽤 되는 교회의 경우에는 머지 않아 파당이 형성되며, 돌이키기 힘든 분쟁의 상황으로 접어드는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이 초신자들 사이에서 발생한다면 -- 물론 그것도 비극이지만 -- 공동체에 끼치는 폐혜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분자들 사이에 발생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공동체 전체가 이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로 치닫고, 혼란과 무질서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며, 회복 또한 무척 긴 시간을 요하게 된다.

직분자는 이런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사실 엄밀히 말해서 경쟁심의 경우에는 예방이 가장 좋은 대처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문제가 발생하고 나서도 이 대처법이 상당히 큰 효력을 갖기는 하지만). 직분자들이 인식하고 마음에 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어떤 직분자 개인이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공동체가 그 사람 하나의 역할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자신과 연관해 표현한다면, “내가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나다고 해도 나 하나 때문에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진술이 형성된다.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이지만 직분자들은 (혹은 우리는) 상당히 많은 시간 이 점을 망각하고 산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 벌어지는 상황, 전개되는 사태 등을 항시 자기 중심의 시각에서 관찰하고 인식하고 판단을 내린다. 물론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정상적인 반응이고 또 마땅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자기 중심성에 완전히 매몰되거나 항시 그것만을 최고의 원리로 상정하면, 우리는 경쟁심/경쟁 의식의 늪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때때로 다른 관점을 도입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태를 어떻게 보실까? 저 사람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볼 때 무슨 생각이 들까? 공동체 전체의 입장에서 평가한다면 이런 조치는 왜 문제가 될까? 등등이 바로 다른 관점의 예이다. 우리가 이처럼 인식의 틀에 모종의 변화를 줄 때, 다른 직분자들이 가진 장점과 조건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나의 장점과 조건들을 귀하게 여긴다면 다른 이들의 장점과 조건들에 대해서도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견지해 마땅하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 다른 직분자들의 은사와 장점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기 원하시는 것이다!! 만일 공동체에 내가 경쟁심을 느끼는 그 직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공동체는 지금보다 훨씬 빈약하고 피폐한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 경우 나는 늘 일인자의 위치를 지킬 수 있어 좋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해 공동체의 다른 이들은 훨씬 더 유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공동체에는 나말고도 다른 -- 그것도 나보다 훌륭한 점을 지닌 -- 직분자들이 더 많이 요구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시각과 인식의 변화가 불건전하고 파괴적인 경쟁심/경쟁 의식에 대한 예방 및 대처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근본 자세를 견지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되고, 이런 태도를 외현(外現)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들 -- 이것은 개인의 처지에 따라 또 공동체의 사정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을 강구해야 하지만, 그래도 우선적인 것은 태도의 변화이다. 직분자가 자신의 마음 속에 늘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경쟁심/경쟁 의식의 해소는 훨씬 빨리, 훨씬 더 쉽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직분자는 공동체적 화합의 도출에 한층 더 가까이 접근하는 셈이 될 것이다.

(iii) 끝으로 직분자들은 그들 사이에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화합의 목표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은 예상 외로 다른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또 사람을 많이 겪어 본 그리스도인일수록 상대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함부로 신뢰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직분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이처럼 다른 사람들을 쉽사리 신뢰하지 않는 것일까? 어떤 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신(不信)과 의심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답변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사람에 대해 선뜻 신뢰의 인장을 찍지 않는 더 그럴 듯한 이유는, 인간 자신의 인식적 제약성 때문이다. 즉 상대방이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신뢰를 확보하는 데 가장 중요시되는 특질로서 일관성(consistency)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관성은 세 가지 서로 연관된 항목으로 묘사되는데, (i) “말과 실천 사이,” (ii) “마음의 동기와 외적 표현 사이,” (iii) “믿음과 행위 사이”의 일관성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과 관련하여 이러한 세 가지 사항에 있어서 일관성이 목격되면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믿음이 간다,” “신용할 만하다,” “신빙성이 있다,” “가신적(可信的)이다” 등의 어구/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이 바로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은 다른 대상의 일관성을 파악하는 데 인식론적 제약을 갖는다. 위에서 소개한 세 가지 항목 모두에는 인간의 내면 -- “말” [이 때 말은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마 12:34)], “마음의 동기,” “믿음” -- 이라는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이 “내면”은 외면 -- “실천,” “외적 표현,” “행위” -- 과 달리 쉽사리 인간의 관찰, 인식 및 판단 하에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이의 일관성을 파악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직분자가 다른 직분자들의 신뢰를 획득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말과 실천 사이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더 쉽게 표현하자면, 직분자는 자신이 약속하고 주장한 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말을 아낌으로써 과장된 언급을 삼가고, 공적 표명일수록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도록 힘써야 한다. 약속을 남발하지 않고 자신의 힘에 부치는 선심성 발언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책임이나 과제를 맡기로 언질을 주었으면 불가항력적인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는 반드시 그 말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직분자들 사이에서 “저 사람은 말이 곧 실천이나 다름이 없다”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혹시 예측 불허의 상황이 찾아와 자신이 말한 것을 실천할 수 없든지 변경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해명과 사과를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처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보완적이고 보상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또 직분자는 마음의 동기와 외적 표현 사이에 일관성이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갖는 헌신의 자세요 자기의 내면을 살피며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다짐하는 바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다른 이로부터 신뢰를 잃고 손가락질 받는 사례들을 보면, 상당히 많은 경우 그의 행동은 외형적 조건을 갖추었는데 내면의 진실성과 선한 의도가 결여된 때임을 알 수 있다. 즉 겉만 번지르르하고 진심과 선의가 빠져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이중적 전략이 단기적으로 한 두 번 정도는 먹혀 들어갈지 모르지만, 장기적인 인간 관계에서는 치명적으로 불리한 효과만을 낳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행동과 활동은 그 자체로서 정당화될 수 없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행위자의 마음 속에 진실성과 순수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내면의 동기가 중요하다고 하여 외적 표현과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실상 신뢰성의 형성이라는 목표를 고려할 경우, 동기의 순수성을 바탕으로 깔되 동시에 외적 표현과 행동 방식 또한 적절하고 합당해야 한다. 만일 직분자가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외적 표현이나 행동 방식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않는다면, 신뢰 형성은 물 건너 간 것처럼 되기가 십상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직분자가 다른 직분자와의 관계에서 부정적 감정의 표출[화, 신경질, 짜증 등]을 절제해야 하고, 또 부정적 견해의 표명[비판, 혹평, 비난 등]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일단 밖으로 현시되고 나면 신뢰의 상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인간 관계의 기본 토대마저 파괴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정당한 성격의 분노나 꼭 필요한 경우의 비평조차 금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충분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작태를 연출한다면, 공격이나 비난을 받은 대상은 수치․억울함․피해 의식 등에 휩싸여 결코 그런 직분자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은 교회의 직분자끼리 견지하는 관계의 성격을 찬찬히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간다. 직분자끼리의 관계는 한편으로 아주 격식만 차리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그런 예의적 성격의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가족과 같이 흉허물없고 쉽사리 오해를 풀 수 있는 식의 친밀한 관계도 아니다. 전자의 경우처럼 예의적 관계에서는 대체로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은 사태가 좀체로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워낙 격식만 갖추는 그런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이런 사태가 다반사라는 점에서 전자와 다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러한 사태가 빈번히 발생해도 같은 식구끼리인지라 어떤 식으로든 억(抑)감정을 풀고 화해하고 예전으로 돌아가기가 쉽다는 데 있다. 그러나 직분자의 관계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즉 상기한 사태는 꽤 자주 발생하는데 해소할 맥락이나 계기는 마련되기가 힘든 그런 독특한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전략은 직분자들 사이에 될 수 있으면 그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동기와 외적 표현 사이에 일관성을 추구한다면, 결국 이 두 가지 사항을 함께 갖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신뢰의 형성은 훨씬 더 하나의 현실로 성큼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신뢰를 획득하고자 할 때 고려해야 하는 마지막 항목은 믿음과 행위 사이의 일관성이다. 그런데 이 항목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 (i) 말과 실천 사이, (ii) 마음의 동기와 외적 표현 사이 -- 일관성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믿음과 행위의 일관성이라는 것은 전기한 두 가지 형태의 일관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단지 현재 우리가 이 주제를 기독교 신앙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형식(약 2:14-26; 요일 3:13-18)을 빌어 또 한 가지 항목으로 구체화시켜 보았을 따름이다.

직분자가 다른 직분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그 신앙이 열매로 나타나는 사랑의 행위 사이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직분자들과 더불어 교회 생활을 하는 중 재정․시간․정신의 면에서 손해를 입고 희생을 겪어야 하는 수가 있더라도 진득하게 참아내야 한다. 이로써 그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 6:10)로서의 신앙적 면모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또 다른 직분자들이 개인 사정으로 인해 무슨 부탁을 하든지 도움을 요청할 때 -- 다음 주 봉사 순서를 좀 바꾸어 달라든지, 혹은 자기 대신 성가대 송년 잔치의 뒷바라지를 일부 맡아 달라든지 등등 -- 흔쾌하고 기꺼운 자세로 응락하는 것도 예로 들 수 있다. 이 또한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는” (행 20:35) 신앙인의 행보이다.

어디 그뿐만이겠는가? 혹시 다른 이로부터 부당한 비난/멸시/중상 모략 등을 당할 때에도, 너무 길길이 뛰지 않고 가능한 한 차분한 심령을 유지한 채 공정히 반응하고자 하는 모습 속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마 5:44),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롬 12:17) 고상한 신앙 정신의 발로가 목격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직분자가 “세상 일이 잘 풀리고” 가정 내에 경사를 맞으며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아 높아질 경우 그 직분자와 함께 진심으로 즐거워할 때 (고전 12:26), 그는 세례 요한이 보여 준 매우 성숙한 수준의 성화 상태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 --를 반영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신행일치(信行一致)의 모습을 나타낼 때 비로소 다른 직분자들도 그를 믿어 줄 것이다.

이처럼 한 직분자가 말과 실천 사이에, 마음의 동기와 외적 표현 사이에, 믿음과 행위 사이에 일관성을 갖추고 또 드러낼 때, 그는 머지 않아 분명코 다른 직분자로부터 신뢰를 획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무척 시간이 오래 걸리고, 때로 자신의 뼈를 깎는 것 같이 힘든 일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세 번째 항목이야말로 공동체적 화합을 도출하도록 돕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너무 많이 나누어지고 걸핏하면 갈라지며 다툼만을 능사로 일삼는 집단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아 왔다. 또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더라도, 대부분 직분자들 사이의 관계는 처음 표면적으로 보기와는 달리 사랑․섬김․우애의 특징이 적고, 그들 사이에 공동체적 화합의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 보기가 쉽지 않은 처지이다. 바로 이런 현장에서 상기한 화합을 일구어 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직분자들이 끼칠 수 있는 최대의 영향력이요,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지금까지 직분자가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두 가지 방면으로 소개했다. 첫째, 직분자는 (i)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함양함으로써, (ii) 사역에 있어서 책임 의식과 성실성을 나타냄으로써, (iii) 겸손과 섬김의 마음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일반 교우들에 대하여 모범이 되고, 동시에 이로써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다. 둘째, 직분자는 (i) 갈등의 현상에 제대로 대처함으로써, (ii) 경쟁심을 해소함으로써, (iii)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공동체적 화합을 도출할 수 있고, 이로써 같은 직분자 그룹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력은 놀랍고 아름다우며 강력한 것으로서, 제대로 발휘될 경우 공동체에 소속한 각 개인과 그룹과 전체에 크나 큰 유익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 직분자와 그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비록 직분자가 (i) 자아상의 굴레, (ii) 호칭 문화의 굴레, (iii) 목회자 관계의 굴레에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약 사항을 뛰어 넘어 이 시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발전에 보람된 기여를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직분자의 영향력이다.

2010년 12월 15일 (수) 작성.

송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