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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탐구포럼시리즈 9] 혐오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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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작성일19-06-12 14:57 조회1,9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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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김선욱, 최종원, 김회권, 송인규, 이일, 김동문, 송진순, 정재영(지은이) | IVP | 2019-06-13

반양장본 | 276쪽 |152*223mm | 386g | ISBN :  9788932811802

 

목차 ________

 

머리말 _송인규 
01 배제와 혐오 동학() _김선욱 

02 왜 기독교는 배제와 혐오의 대열에 서게 되었는가_최종원

03 성경에 포함된 혐오와 저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_김회권

04 기독교 진리는 혐오를 함의하는가_송인규

05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혐오 표현의 정의, 해악, 대응_이일

06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_김동문

07 동성애, 혐오를 넘어 편에 서기_송진순

08 혐오 표현에 대한 개신교인의 인식_정재영 
부록: 설문조사 문항


혐오와 배제를 넘어 포용과 공존으로

기독교의 혐오 표현 실태와 양상, 그 연원을 톺아봄으로써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구체적 삶의 모습과 태도, 이 시대 교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한다!



혐오가 두드러진 특징인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
지금 우리 사회에는 각종 혐오가 넘쳐흐른다. 특히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 공간 속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말과 감정이 이미 수위를 넘어섰다. 나와 다른 타인 혹은 집단에 대해 포용심은커녕 행여 조금이라도 내 영역이나 이익을 넘볼까 경계하는 날선 눈초리를 넘어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 혐오의 감정을 품는다. 문제는 이것이 여성, 노인, 어린아이, 그리고 성소수자와 외국인 노동자, 무슬림 등 사회의 소수자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종 끔찍한 폭력 사건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혐오의 감정이 아무렇지 않게 유무형의 폭력으로 분출되고 있다. 

교회는 과연 치유의 공간, 화해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
이 혐오의 시대에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교회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교회가 혐오의 온상이 되고 있다. 그것도 진리의 이름으로. 이에 아홉 번째 교회탐구포럼은 교회가 어떻게 혐오의 배양지가 되었는지 성찰한다. 과거에는 기독교인이 혐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박해받았다. 그런 아픔을 가진 교회가 오늘날 어떻게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지, 어떤 쟁점이 있는지, 진리 수호라는 명분이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과연 교회는 혐오를 치유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신앙 훈련 과정에서 우리는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미워해야 할 것은 미워하고 혐오해야 할 것은 혐오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므로 신앙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명료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혐오 행위에 참여하거나 맞서는 분명하나 입장을 갖기가 쉽지 않다. 증오와 혐오는 다르며, 이는 구별과 차별과 배제의 행위와 연결된다. 따라서 신앙적 입장을 따지기 전에 우리는 이런 것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어떻게 궁극적으로 혐오라는 행위가 나오는지, 또 혐오 행위는 왜 문제인지를 먼저 철학적으로 따져 보아야 한다. _김선욱, "배제와 혐오의 동학" 중에서 

종교의 가르침과 배제와 혐오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은 배제와 혐오에 대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교회, 그중에서도 주로 신앙적 혹은 신학적 '정체성'을 강하게 내세우는 집단일수록 배제와 혐오의 발언을 여과 없이 내뱉는 경우가 흔하다. 성경은 천하보다 귀중한 것이 한 사람의 생명이라고 가르친다. '천하'에 국가가 포함됨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에 무색하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피상의 가치를 지키느라 실제 존중해야 할 이웃의 존엄과 가치를 외면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_ 최종원 "왜 기독교는 배제와 혐오의 대열에 서게 되었는가" 중에서  

제일 중요한 점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저주와 혐오, 차별적 배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 흡인적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시효가 끝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는 율법의 저주에서 이스라엘과 열방을 속량하셨다. 나사렛 예수가 구약성경에 축적된 타자 증오, 혐오, 배제, 저주 등 모든 부정성을 극복했다. 그는 죽을 만큼 상처를 당했으나 보복의 악순환 고리를 끊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악의 활력과 생기는 마력을 잃는다. 폭력과 죽음은 더 이상 저주와 보복 기원을 촉발하지 않는다.  _김회권 "성경에 포함된 혐오와 저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중에서 

요즘 한창 논의의 초점으로 부각된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무슬림 혐오에 보수적 개신교도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이 이슈에 떳떳이 맞설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각종 혐오가 판치는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사태의 심각성을 완화시키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 더불어 혐오 없는 세상을 꿈꾸느냐 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혐오의 파급과 번창에 기여하고 있다니, 이 어찌 곤혹스러운 처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 눈의 들보를 빼야 여타의 티 또한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_ 송인규 "기독교의 진리는 혐오를 함의하는가"중에서